똑같은 것을 대해도 어떤 사람은 거기서 많은 것을 깨닫고 얻어내지만, 어떤 사람은 한, 두 가지 밖에 얻지 못한다. 사람들은 이를 능력 차이라고 말하는데, 사실 우리는 어떤 대상으로부터 무엇을 얻어내는 게 아니라 그것에 의해 촉발된 자기 안의 무엇인가를 뽑아내는 것이다. 그러니 나를 풍요롭게 해 줄 대상을 찾지 말고, 나 스스로가 풍요로운 사람이 되려고 항상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기의 능력을 높이는 최선의 방법이자 풍요로운 인생을 만드는 지름길이다.
- 니체 , <즐거운 학문> 중

 

Water falls

Water falls from bright air.
It falls like hair, falling across a young girl’s shoulders.
Water falls making pools in the asphalt, dirty mirrors with clouds and buildings inside.
It falls on the roof of my house.
It falls on my mother and on my hair.
Most people call it rain.
- 영화 <패터슨> 중


하늘에서 물이 떨어지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물이 떨어질 때의 하늘색은 어떤 색일까. 물이 떨어지는 템포, 땅바닥에 부딪혀서 튀는 모양, 땅에 도달하고나서의 흐름. 집에서 창 밖을 바라보고 있을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 우산을 함께 쓰고 있을 수도 있다. 비 내리는 날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폭포(Waterfalls) 이야기일 수도 있다. '비'라는 단어 하나로 이 심상들을 담아내기에는 무리다. 아무리 번역을 잘 해도 원문의 아우라를 온전히 담아내지는 못할 시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고등학생 때 정적분의 정의를 처음 이해하고 전율이 일었던 기억이 난다. 수식 한 줄뿐이지만 거기에 담긴 개념들과 아이디어들이 얼마나 환상적으로 어울리고 있는지. 꼬불꼬불한 면적을 정확하게 구할 수 있다니. 미분과 적분이 서로 연결 된다니. 초중고등학교에서 배운 수학이 전부 그 수식 한 줄을 위해 달려온 느낌이었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졌고 짜증을 유발할 때도 많지만 이 기호의 무궁무진한 확장성을 접하노라면 새삼 다시 감탄하곤 한다.

대학 다닐 때 수강한 '인문과 예술의 세계' 에서는 유토피아를 문학, 역사, 예술의 관점에서 다뤘다.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예술이다. 영국 예술가 윌리엄 모리스는 러시아 혁명이 지나고 나면 유토피아가 올 것을 확신했다. 유토피아의 실현을 가정했을 때 우리의 삶과 노동이 어떻게 되겠는가가 이 사람의 주제 중 하나이다. 모든 사람이 일을 그만둘까? 절대 아닐테다. 분명히 일을 정말 사랑하고 끊임없이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반면에 돈 걱정이 없어진 세상이 온다면 하고 있는 일을 당장 그만두는 사람도 많을테다. “예술의 창조와 그것에 따르는 일의 즐거움은 회화나 조각 등의 예술작품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노동의 일부이고,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한다."라는 윌리엄 모리스의 어록에서 이 차이를 짐작해볼 수 있었다. 예술이나 시가 별거 아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새로운 시선을 발견 하고 어떤 형태로든 풀어낸다면 전부 예술이라 생각한다. 이런 면에서 이전 룸메이트 중 한 명은 아티스틱했다. 옷걸이를 반으로 접고 구부려 모자를 걸고 택배 박스에 종이를 붙여 신발장을 만들었다.(윌리엄 모리스는 생활공예를 강조했다.) 청소도, 수학도, 요리도, 딥러닝도 전부 예술이다.

마침 Coldplay의 새 앨범 제목이 "Everyday Life"이고 아이유의 새 앨범 제목은 'Love Poem'이다. 그녀는 곡 설명에 이렇게 썼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 내 사람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참견을 잘 참지 못한다.
하지만 이제는 나의 그런 행동들이 온전히 상대만을 위한 배려나 위로가 아닌 그 사람의 평온한 일상을 보고 싶은 나의 간절한 부탁이라는 것을 안다.
염치 없이 부탁하는 입장이니 아주 최소한의 것들만 바라기로 한다.
이 시를 들어 달라는 것,
그리고 숨을 쉬어 달라는 것.
누군가의 인생을 평생 업고 갈 수 있는 타인은 없다. 하지만 방향이 맞으면 얼마든 함께 걸을 수는 있다. 또 배운 게 도둑질이라, 나는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든 노래를 불러 줄 수 있다.
내가 음악을 하면서 세상에게 받았던 많은 시들처럼 나도 진심 어린 시들을 부지런히 쓸 것이다.
그렇게 차례대로 서로의 시를 들어 주면서,
크고 작은 숨을 쉬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나의 시를 쓰고 싶고 당신의 시도 듣고 싶다. We want bread, but roses t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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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을 마시면 일차로 대뇌가 해방되지. 밥맛이 생기는 단계를 서서히 지나면 과묵한 사람은 말이 많아지고 소심한 사람은 큰소리를 치고 파멸에 이른 사람은 절망을 잊어.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봐줄 만하네. 더 마시면 소뇌가 해방되네. 비틀거리고 혀가 꼬이지. 제가 흔들거리면서 똑바로 서 있는 남들보고 아쭈 요게 피하네. 하는 사람들 봤겠지. 그다음에도 더 마시면 중뇌의 해방을 맞게 돼. 체온이 떨어지고 혈압이 떨어진다네.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봐줄만하네. 그 다음에는 연수의 해방. 해방은 좋은데 부작용으로 호흡의 곤란이 생기는가 봐. 알코올 혈중농도 0.5 퍼센트 이상이 되면 절반은 죽는데. 그러면 영원한 해방을 맞겠지. ...

<해방- 술 마시는 인간>, 성석제 


음주를 좋아한다. 대뇌를 해방하는 경험이 좋다. 취중진담이라는 말처럼 취했을 때가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이래저래 눈치 보느라 억압된, 무의식에 잠긴 속마음을 만나기도 한다. 실언을 하거나 불편한 진실을 알게 되어 불쾌한 기분이 들 때도 있지만 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어서 나름 도움이 된다. 용기가 없어 머릿속으로만 맴돌던 말을 하기도 한다. 혼술을 할 때면 혼잣말을 하고는 실실 웃는다. 킥킥거리다가 다음날 이불킥.(죄송...) 이런 이유로 인용문이 인상 깊었다. 압박해오는 것들로부터의 해방. 의식과 자기 검열로부터의 해방. 글이 안 써지거나 문제가 안 풀리면 술을 찾을 때도 있다. 20대 초반엔 중뇌까지 해방하곤 했는데 요즘엔 건강을 생각해 대뇌에서 그만하려고 노력한다. 같이 대뇌를 해방하고 싶으신 분은 연락 주시라.


Vincent van Gogh, chemistry and absin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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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시(散文詩) 1   /   신동엽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묻은 책 아이덱거 럿셀 헤밍웨이장자(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가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대씩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쪽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내는 미사일기지도 땡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사색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한 연구 기관의 딥러닝 입문자 강의에 이틀간 실습 조교로 참여했다. 주로 이미지 데이터를 Segmentation task에 맞게 전처리 하고 모델을 학습하는 내용이었다. 여느 수업이 그렇듯 잘 따라가는 분들도 있지만 더딘 분들도 있었다. 그 중 세 분에게서 공통적으로 느낀 인상이 있다. 민망할 정도로 고마워 하시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질문하시고,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요?’식으로 유도했을 때 코드 실행을 두려워하셨다. 소속 기관에서 임금을 지불했으니 맘껏 질문하실 권리가 있다, 시행착오를 겪는게 당연하고 해보고 안되면 코드를 고치면 되니 해보시라 해도 잘 안 변했다. 약간의 친밀감이 생기고 나서야 ‘부끄러워서’, ‘바보 같아 보여서’ 그렇다고 하셨다.

문득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는 한동안 일 때문에 한글 문서 편집을 많이 해야했다. 도움을 청할 때면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최대한 개입을 줄였다. ‘이렇게 하면 돼?’라는 말이 많이 나왔다. ‘일단 해보시라고, 해보고 아니면 취소하면 된다고, 자료 다 날라가는 거 아니다’라는 대답을 많이 했다. 연구원 분들과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속상했다.

‘눈치를 보는가?’로 권력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의 기분을 살피며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펼치지 못하거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그렇다. 스스로가 위축되어 저자세를 자처하기도 한다. 엄마는 내가 피곤한 기색을 보이거나 답답해 하는 것 같으면 다음에 해도 괜찮을 거라고 하곤 했다. 이런 관계는 조건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거로 보인다. 지식, 외모, 젊음, 신체 조건, 직급, 재력, 젠더, 지역, 인종 등등. 고백컨대 한 때는 성적이 낮은 친구를 놀리거나 무시하기도 했다. 지금도 가끔씩 고압적인 자세를 취할 때가 있다.

좀 더 나은 조건 때문에 상대를 위축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건 중 다수는 우연히 얻은 게 많고(부모님 세대와는 다르게 초등학생 때부터 컴퓨터를 가깝게 둔 세대이다. 마침 20대 때 인공지능 붐이 일어나면서 시간과 체력이 많을 때 익힐 수 있었다. 부모님의 지원으로 돈 걱정 없이 학업을 할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은 서로 의지하고 있으며(엄마의 가정학 지식에 항상 도움을 받는다. 가을, 겨울 옷이 어쩜 그렇게 새 옷처럼 보관되어 있는지!), 무엇보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기 때문이다. 눈치 보지도, 눈치 주지도 않으면서 살고 싶다.

p.s.)포기하지 않고 계속 버티신 분은 결국 건물과 자동차와 배경을 분리해내는데 성공했다. 코드가 잘 보이지 않아 글자를 최대한 키워놓고 거북목으로 화면을 보던 50대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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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 김용택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 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시집《그대, 거침없는 사랑》(푸른 숲) 中


따로 지정해둔 벨소리가 울린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할까 설레면서 전화를 받는다. 한껏 들뜬 목소리로 달이 떴다고 좀 보라고 한다. 매일 뜨는 달이 뭐 대수인가 싶으면서도 네가 신나 하니 나도 신이 난다. 한 달 전 이맘때가 추석이니 지금쯤 보름일 테다.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생각해보니 이건 정말 엄청난 일이다. 달이 떴다고 전화를 하다니. 눈을 감고 근사한 밤하늘을 떠올려 본다. 정말이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다. 밤인데도 밝고 청명해서 사물들이 또렷이 보이고 강 흐르는 소리마저 들린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선물해준 네가 사무치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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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하라 - 보들레르

언제나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다. 그대의 어깨를 짓누르고, 땅을 향해 그대 몸을 구부러뜨리는 저 시간의 무서운 짐을 느끼지 않으려면, 쉴새없이 취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에? 술에, 시에 혹은 미덕에, 무엇에나 그대 좋을 대로. 아무튼 취하라.

그리하여 때때로, 궁전의 섬돌 위에서, 도랑의 푸른 풀 위에서, 그대의 방의 침울한 고독 속에서, 그대 깨어 일어나, 취기가 벌써 줄어들거나 사라지거든, 물어보라, 바람에, 물결에, 별에, 새에, 시계에, 달아나는 모든 것에, 울부짖는 모든 것에, 흘러가는 모든 것에, 노래하는 모든 것에, 말하는 모든 것에, 물어보라, 지금이 몇시인지. 그러면 바람이, 물결이, 별이, 새가, 시계가, 그대에게 대답하리라. "지금은 취할 시간!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라, 끊임없이 취하라! 술에, 시에 혹은 미덕에, 그대 좋을 대로."


_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
불문학자 황현산 번역, 문학동네 (2015)
프랑스어 원문


시인은 단호하다인생의 모든 유일한 문제를 취했는지로 일축한다시간의 무게가 우리를 누르기 때문이다
오늘아침잠은 깼지만 자리에서 일어나기 싫었다하루를 어떻게든 채워야하는데 기대가 안 됐다
인생노잼 시기가 이런거구나 싶었다새로운 목표를 잡았을 모든게 흥미로웠는데 익숙해지니까 무뎌졌다
모든게 재미 없어지면 '살지'라는 생각이 떠오른다수십 번 질문해도 답이 없었기에 이젠 이렇게 대응한다
취하자그러나 무엇에뭐든 떠올렸다
기술로 이뤄낼 있는 , 좋은 회사, 김동률 콘서트, 주말 약속부모님 걱정 덜기, 보고싶은 영화가고싶은 여행먹어본 맛집 등등
취기가 가시고 다시금 권태가 스멀스멀 올라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면 또 다시 몰입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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